본문 바로가기

EDITORIAL ARTICLE

가능성 (可能性)



 가능성(可能性)이 얼마나 될까요? 가능성은 애초에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데이터를 베이스로 여러가지 가상으로 무장한 가능성을 숫자로 표현한 확률은 그저 과거의 일들과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예상을 수치화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가능성의 수치가 '0' 이 아니라면, 그것은 '절반'의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자면, 복권이 당첨될 확률이 몇십억 분의 일이 아닌, 당첨이거나 꽝이거나할 이 두가지 결과의 확률처럼 말이죠.


 반대로, 높은 가능성을 지닌 것들도 때론 잘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너무 높은 가능성을 맹신한 채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그 가능성을 수치화하는 작업 또한 별로였을 수도 있지만 말이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은 너무 단순한 것이지만, 물론 말이 쉽지, 그것을 해내는 이를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해내는 이를 사람들은 '난사람'이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 그럼 우리가 난사람이 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요?


 제가 느꼈을 때는 난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초심은 같다고 생각합니다. 모두 멋진 청사진을 머릿속에 그립습니다. 위대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모두 말입니다. 그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만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가는 과정 중에 '희로애락'이 있을 것이라 알고 있고 말이죠. 그리고선 모두 청사진을 그려나갑니다. 잘 그려지지 않는 상황이 닥쳐오면 이것이 맞는 것인지 헷갈리기도 하고 남의 그림이랑도 비교도 해보게 되고 누군가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하죠. 그러다 보면, 자기 자신을 더불어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탓하게 되죠. 여기서 두 가지의 타입의 생각으로 나뉘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 타입은 애초에 자신의 환경이 좋을 거라는 가능성을 '0'으로 두고 청사진을 그립니다. 그렇지 않은 두 번째 타입은 환경이 좋아질 수도 있을 거라는 가능성을 두게 되는데, 이것은 반대로 이 그림을 그리다가 관둘 가능성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이죠. 물론, 자기 자신은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다고 느끼거나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인즉슨 더 나은 환경이 될 거라는 기대의 가능성은 그렇게 되지 않게 되면, 청사진을 완성할 수 있을 가능성까지도 떨어진다고 판단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그만두는 것이 나을 거라 생각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앞으로 한국 사회 및 경제가 좋아질 거라는 가능성을 '0'으로 생각하고 임해 왔고 앞으로도 그렇습니다. 물론, 제가 속해 있는 이 시장이 건강하게 성장하고 더 커지길 진심으로 기도하지만, 그런 환경으로 스스로 발전할 가능성은 '0'이라고 생각하고 임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그것은 제가 생각하는 청사진을 완성할 수 있는 가능성에 영향을 줄 변수가 아닙니다. 그것은 단순히 '0'이기 때문에.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저의 가능성은 언제나 '50'입니다. 그것이 끊임없는 노력으로 인해서 '51'이 된다면 좀 더 가능성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나저나, 이것을 공감해줄 사람들이 있을 가능성(可能性)이 얼마나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