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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SSC MUSIC : 32ND TRACKLIST





안녕하세요. 슬로우스테디클럽 입니다. 장마 아닌 장마가 5월부터 찾아온게 제일 신기했던 지난달이었네요. 역시나 각종 행사와 공휴일로 가득찼던 알찬 가정의 달은 1년 중에 제일 빨리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나무들은 더욱 힘차게 하늘을 향해 뻗쳐 나가고 있고, 사람들의 옷차림도 점점 더욱 가벼워지고 있네요. 이 가벼워진 옷차림처럼 지난달보다 조금 더 가벼운 느낌으로 돌아온 SSC MUSIC 입니다. 


이번 트랙리스트에 대해 소개를 해드리기 전에, 제가 좋아하는 영화 중에 1995년에 개봉한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 알 파치노 주연의 '칼리토'라는 작품에 대해 먼저 소개해 드리고 싶네요. 이 영화의 주인공인 '칼리토 브리간테'는 마약과 뒷골목, 범죄 등으로 점철된 지난 삶을 후회하며 과거를 청산하고 착실히 돈을 모으며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꾸려나갈 밝은 미래를 준비하려고 하지만 믿었던 친구 때문에 큰 사건에 휘말리고 배신까지 당하며 위기를 겪는 내용으로 전개 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꽤 비극적인 결말입니다. 영화의 엔딩씬에서는 칼리토가 꿈꾸던 낙원의 모습을 비춰주며 끝이 나는데요.





<Carlito's Way Ending Scene>




실은 5월이 거의 다 끝나갈때까지 6월의 트랙리스트를 어떻게 구성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여름이 다가오니 시원한 느낌으로 구성해보고 싶었으나 단순히 계절의 느낌만을 상상하고 구성을 하기엔 영감의 원천이 없었기 때문에 그 셋을 뒷받침 해줄만한 스토리도 없다는 뜻인데, 스토리가 없다면 메세지도 있을수 없고 메세지가 없다면 저에겐 여러분에게 절대로 자랑스럽게 소개해 드릴수가 없습니다. 6월이 점점 가까워지며 고민이 더욱 극심해지던 와중에, 우연히 친구와 이 영화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게 되며 우연히 이 영화에서 모티브를 따오게 되었습니다.


칼리토가 사랑하는 여인과 그토록 가고 싶어했던 낙원의 아름다운 모습. 칼리토가 사랑하는 여인인 게일로 추정되는 여인이 어린 소년 소녀들과 즐겁게 춤을 추고 있는 실루엣을 보여주고, 배경 음악으로는 Joe Cocker (조 콕커) 의 'You Are So Beautiful'이 흐릅니다. 뭔가 아이러니 하죠. 비극적인 결말이지만, 엔딩씬은 그 무엇보다 아름답습니다. 이루어지지 못할정도로 아름다운 소망이었기에 이 장면은 슬프게 느껴지기도 하고, 눈을 감는 순간까지 사랑하는 여인과 낙원에서 함께할 생각을 한 칼리토의 로맨틱한 모습이 감동적이기도 하고 참 여러가지 감정들이 복잡 미묘하게 느껴집니다. 


오랜만에 보게된 이 엔딩씬을 통해 칼리토와 게일의 낙원에 어울릴만한 노래를 구성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바로 이거다!' 싶어 바로 트랙 디깅 작업에 들어가기 시작 하였습니다. 들어보시면 아시겠지만 트로피칼의 색채가 짙은 딥하우스로 주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듣다 보면 중간중간에 몽롱한 느낌이 강하게 들수도 있지만 리듬감은 전혀 느리지 않습니다. 몽롱함과 리드미컬함의 중간에 놓여진 애매모호함을 즐겨 주셨으면 좋겠네요. 이번 트랙리스트는 Coastal Haze (코스탈 헤이즈) 레이블의 Hugo Jay (휴고 제이), Pool Boy (풀 보이)과 Project Pablo (프로젝트 파블로), Adam Feingold (애덤 페인골드), Fluid X (플루이드 엑스) 등의 아티스트들의 트랙들로 구성 되어 있습니다. 




    



<Francois K>




디제잉도 잘하면서, 프로듀싱도 잘하는 DJ는 생각보다 꽤 드문것 같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봐왔던 공연들 중에서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곡들로 인한 명성에 비해 디제잉의 수준은 기대에 반만도 못미치는 정도를 보여줘서 실망을 한 경험도 있었고, 또 너무나 좋은 트랙임에도 불구하고 그 곡을 어느 뮤지션이 라이브 공연에서 연주했을때 '어? 잠깐만, 이거 집에서 그냥 혼자 들었을때가 더 좋았던거 같은데?' 라고 느꼈던 경험도 있었습니다. 물론 위에 나열한 상황들은 뮤지션의 역량이 아닌 베뉴의 사운드 시스템 또는 뮤지션의 성향과는 어울리지 않는 베뉴에서의 공연으로 인한 이질감 등이 작용함으로 인해 느낀 것들이지만, 기대와는 달랐다는 점은 동일한데요, 이 기분은 기분좋게 춤추러 온 클럽에서 아주 김빠지기 쉬운 상황이라고 볼 수있죠. 이날 밤은 그저 고개를 까딱이며 땀 한방울 흘리지 않은채 진토닉을 마신후 조용히 집으로 가게 되는 날이라 백프로 확신합니다.


사실 이러한 경우를 저는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좋아하는 아티스트던, 싫어하는 아티스트건, 또는 아예 모르는 아티스트라고 할 경우에도 분명히, 매우 냉정하게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습관화 되어 있는 편입니다. 그러한 태도는 이러한 상황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태도에 대입해 보아도 매우 이성적인데요, 실은 우리 모두가 어떠한 것에 대해 큰 기대를 했는데, 결과가 기대만큼 따라와주지 못했을때 기대의 크기에 비례한 만큼의 실망이 따라오곤 합니다. 실망의 크기가 클수록, 그것은 더욱 이겨내기 어려운 것이란건 누구나 다 잘알고 있습니다. 전 기대라는 것을 버리는 순간 더 많은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기대를 하지않고 매순간을 대하다 보니, 어떤 결과가 저를 기다리고 있던 저에게 중요한 것은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것 뿐이었습니다. 실망을 하지 않으니, 저에겐 실망을 이겨낼 시간이 필요 없어졌습니다. 그 시간에 더 나은 결과를 만들기 위한 고민을 더욱 할 뿐이었으니, 얼마나 합리적인 태도인가요? 


아무튼간에, 때는 2014년 7월 3일 목요일. 당시 강남에 위치한 대형 클럽 '앤써' 라는 베뉴에서 레드불 뮤직 아카데미 (이하, RBMA) 에서 주최하는 파티에 게스트 DJ로 하우스의 큰 형님들인 Francois K (프랑소와 케이), Danny Kravit (데니 크래빗)가 초빙되었습니다. 사실 이때의 전 하우스 / 테크노 라는 음악과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크게 없는 상태였고, 이 파티를 갔던 이유도 지금은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초대를 받았던 것 같기도 하고, 친구와 우연히 방문하게 되었던 것 같기도 하고 가물가물 하네요. 한 마디로 전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던 상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날 밤을 왜 좀 더 재미있게 즐기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도 들긴 하지만, 이런 DJ를 보았다는 사실만으로 전 기분이 좋아지네요. 왜냐면, 전 디제잉도 잘하면서, 프로듀싱도 잘하는 DJ가 음악을 플레잉하는 플로어에 있었기 때문이죠. 아무런 기대도 없었던 그날, 하우스의 진가를 깨닫게 도움을 주었던 그 디제이. 바로 프랑소와 케이에 관해 오늘은 이야기 해보고자 합니다.




<Francois K - Awakening>




1954년 프랑스에서 태어나고 자라온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어렸을 적 부터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그는 드럼을 연주하기 시작했고, 1975년 드러머의 소망을 이루고자 미국의 뉴욕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이 시기가 그의 첫번째 터닝 포인트라 볼 수 있는데요, 그는 드러머로 음악적 성공을 거두기엔 자신의 역량을 보여줄 수 있는 공연에 설 수 있는 기회를 낚아채기 굉장히 어렵다고 느꼈고, 실제로도 그러했습니다. 70년대 중반은 80년대 초반까지 디스코의 전성기가 시작되는 시기였기 때문에, 클럽들이 밴드의 공연 보다는 DJ 중심으로 운영되는 댄스클럽 으로 하나둘씩 변모되어가는 과도기 였을 것이라고 추측해봅니다. 


1976년, 이러한 변화를 눈 앞에 맞닥뜨린 그 청년은 이내 클럽의 DJ가 되어야 겠다는 결심을 하고 곧 언더그라운드 클럽에서 DJ로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가 바로 훗날 뉴욕 하우스 씬의 전설이 될 Francois K (프랑소와 케이) 입니다. 




<View Of The Paradise Garage>




<View Of The Paradise Garage>




프랑소와 케이는 DJ 경력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능력을 인정받았고, 단순히 파트 타임 형식의 디제이가 아닌 한번의 플레잉이 끝나면 다른 베뉴로 이동하여 플레잉 하고, 그 플레잉이 끝나면 또 다른 베뉴로 플레잉 하러 가는 식의 바쁜 일정을 소화해내야 하는 DJ로 거듭나게 됩니다. 초창기 하우스 디제이들은 테이프와 테이프를 적절히 이어붙여 (Tape-Editing 이라고도 합니다.) 히트곡 메들리를 만들어 플레잉 하여 플로어를 뜨겁게 달구는 방식을 많이 선호하였는데요, 프랑소와 케이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 역시 테이프 에디팅과 히트곡 메들리를 적극 활용하였기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프랑소와 케이가 거쳐갔던 파라다이스 개러지 라는 클럽의 당시 플로어를 촬영한 사진을 보시면 당시 클러버들의 패션이 디스코의 그것과 일맥상통하고 있다는 점이 느껴지실 겁니다. 80년대와 90년대의 영국과 독일의 클럽씬에서 주로 볼 수 있었던 후줄근하면서 편한 복장과는 다르게 좀 더 팬시한 느낌이 강합니다. 사실 테크노도 그러하고 디스코도 그러하듯이 이 두개의 단어는 단순히 음악의 장르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 전체를 지칭 한다고 저는 생각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서 힙합이 장악하고 있는 음악 뿐만 아니라 패션, 정신 등을 보면 잘 알수가 있죠.  음악이 음악을 뛰어넘어 문화가 되었을때, 그때가 진정하게 꽃이 피는 순간이 아닐까 싶네요 록이 되었던 디스코가 되었던 테크노가 되었던 말입니다.




<Demonstrates Editing Analog Tape By Bradshaw Leigh>



당시 디제이들에게 있어서 그러한 스킬들을 잘 다루기 위해 이러한 장비들을 다루는데 익숙해져야 함은 물론 출중하게 잘 다뤄야만 플로어의 댄서들을 더욱 신나게 춤추게 할 수 있는 테이프가 완성되기 때문에, 디제이들은 음악을 그날의 플로어, 날씨 등에 어울리게 플레잉 하는 센스 뿐만이 아닌 기계에 대한 기술적인 이해도도 간과할 수 없는 큰 부분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이런 기계들을 잘 다루게 된 DJ 들이 훗날 유능한 프로듀서나 엔지니어로도 거듭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위의 제가 첨부해드린 동영상을 보시면 얼마나 정교한 손놀림이 필요한 작업인지 여러분에게도 그 당시 DJ들의 섬세함이 전달 되었으면 좋겠네요.




<Sharon Redd - Never Give You Up, 1982>




<D-Train - You're The One For Me, 1981>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프랑소와 케이 역시 자연스레 프로듀서와 엔지니어로써의 길을 걷게 됩니다. 초창기에 프랑소와 케이는 Prelude Records (프렐류드 레코즈) 에서 A&R (아티스트&레퍼토리) 의 포지션으로 있기도 했었는데, A&R은 레이블 내에서 아티스트로써의 포지션도 있지만 그 외에 아티스트 발굴, 계약 및 육성을 포함하여 기획,제작,홍보 등의 폭 넓은 업무들을 아우르는 직위 입니다. 


이때 당시는 클럽 문화가 태동하던 때라 이 당시에 하우스에 관련하여 폭넓은 범주의 업무들을 주무를수 있는 포지션에 위치하고 있던 프랑소와 케이 입장에서는 단순히 음악을 플레잉 하고 제작을 하는 입장이 아닌, 실질적으로 여러가지 측면에서 음악을 분석하고 바라볼 수 있게 해줬던 업무를 수행했기에 뉴욕의 하우스를 정의내리고 발전시키고 널리 알리기 가장 유리한 조건이 아니었나 싶네요. 그러한 유리한 조건 역시 그가 뉴욕 하우스 씬의 계보에서 없어선 안될 인물로 자리잡게 된 큰 요인으로도 작용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Musique - In The Bush (A Francois Kevorkian Mix), 1979>




<Sharon Redd - Beat The Street (A Francois Kevorkian Mix), 1982>




프렐류드 레코즈 시절 프랑소와 케이는 리믹스 작업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는데, 1978년 발표된 Patrick Adams (패트릭 애덤스)가 프로듀싱을 담당한 Musique의 'In The Bush'가 그의 첫 리믹스로 잘 알려져 있는데요. 클럽과 라디오에서 모두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본격적으로 프렐류드 레코즈 만의 사운드로 뉴욕의 댄스 뮤직의 틀을 더욱 확고한 기반으로 자리잡게 하였습니다.  


아, 우선 이쯤에서 아마 한가지 의문점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있을수도 있습니다. 왜 하우스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그지만 이때 당시의 작업물에서 디스코의 느낌이 더욱 물씬 풍겨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이부분을 좀 더 명확하게 이해시켜 드리기 위해서 하우스와 디스코의 역사를 좀 더 면밀히 살펴봐야 합니다. 


앞서 설명해드렸듯이 이때 당시의 댄스뮤직은 Funk (훵크), Disco (디스코) 등의 장르로 축약하여 설명해볼수 있는데요, 이런 곡들을 녹음하기 위해서는 우선 스튜디오가 필요 했습니다. 곡을 연주하는데 필요한 드럼과 기타, 베이스 그리고 보컬을 소화해낼 수 있는 싱어가 필요하기 때문이죠. 한마디로 모든것이 실제의 악기로만 사용하여 트랙을 만들어 낼수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보다 질높은 디스코 사운드를 만들어 내는데엔 효과적이었을지 모르지만, 실제 트랙을 클럽에서 플레잉 할 시에 곡과 곡 사이를 연결하는 중간 지점을 찾기도 어려웠을 뿐더러 (테이프 에디팅이 이런 이유에서도 발전되었던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트랙을 제작하는데 드는 시간적 경제적, 공간적 문제가 결합하여 한계점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80년 세상에 출시된 Roland (롤랜드) 사의 드럼머신 TR-808이 디제이와 프로듀서들 사이에서 주목을 받게 되는데요. 사실 이 제품은 록 밴드를 위해 만들어진 제품으로, 드러머 대신에 드럼을 연주해줄 수 있는 악기로써 발명된 것이었으나, 록 밴드들에게는 철저히 외면 당하고 오히려 힙합과 디스코 씬에서 환영을 받게 됩니다. 이 드럼머신과 신디사이저를 이용하여 프로듀서들은 좀 더 손쉽게 트랙을 프로듀싱 할 수 있게 되며, 이때가 디스코에서 진정 하우스로 진화되어가는 시기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Dinosaur L - Go Bang (Francois K Remix), 1982>




<Yazoo - Situation (Francois K Remix), 1982>




드럼머신의 등장으로 인하여 하우스와 클럽씬의 발전은 더욱 더 가속화 되었고 프로듀서들은 편리한 전자악기의 등장으로 인해 같은 시간 내에 작업량 또한 더욱 늘릴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다시 새로운 변화의 국면을 맞게 된 뉴욕의 언더그라운드 씬. 이러한 국면에서 프랑소와 케이는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됩니다. 1982년 그는 프렐류드 레코즈를 떠나기로 마음 먹고 레이블과 작별하게 됩니다. 그후 같은 해 그는 두개의 리믹스를 발표하게 되는데, 각각 'Dinosaur L'의 'Go Bang'과, 'Yazoo'의 'Situation'으로 이 두개의 트랙은 빌보드 뮤직 댄스 차트에도 오르게 되며 그의 인기는 날로 갈수록 더욱 높아지게 됩니다. 


아마 그는 도전을 즐기는 개척정신을 가진 사람이기에 틀림 없습니다. 어디에도 사실 크게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그는 프렐류드 레코즈에서 별 큰문제 없이 활동을 이어 왔으나, 이내 자신만의 스튜디오를 설립하기 위해 그곳을 떠나게 됩니다. 우리 자신을 포함해 누구나 실은 다 안정적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안정적인 삶을 원하지만, 정작 우리의 삶은 늘 불안과 고통으로 가득차있죠. 그런데 이런 상황에 자주 맞닥뜨리다 보면 그것을 인정하게 되고, 인정하는 것을 넘어 좀 더 뭐랄까요. 즐길수도 있게 됩니다. 여기서 즐긴다는 의미는 재미를 느낀다기 보다, 그 안에서 더욱 성장하고 스스로가 그것을 통해 배움으로써 보람과 자부심, 긍지를 축적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프랑소와 케이도 그런 정신이 있었기에 레이블을 박차고 나오지 않았을까요? 꼭 그것이 아니더라도 그의 에고 (Ego)가 그를 다른 곳으로 이끌었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Kraftwerk - Tour De France (Francois Kevorkian Mix)>




<U2 - New Year's Day (Francois K Remix), 1984>




<Ashford & Simpson - Babies (François K Dub), 1985>




<Cabaret Voltaire - Here To Go (François Kevorkian Little Dub Remix), 1987>




<Pet Shop Boys - Rent (The François Kevorkian 12" Remix), 1988>




프랑소와 케이는 1983년 자신만의 스튜디오를 설립하였고 이때부터 1990년까지 그는 디제잉보다는 리믹스 작업과 프로듀싱 작업에 더욱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이 시기의 그의 작업물들을 몇가지를 소개해 보았는데요, 일단 들어보시면 아시겠지만 디스코 시절의 훵키함이 어느정도 살아있긴 하지만 드럼머신과 신디사이저 등의 전자악기의 보편화로 인해 더욱 기계적인 요소들이 많이 가미되어 있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Kraftwerk, U2, Depeche Mode, Pet Shop Boys 등의 이름만 들어도 혀를 내두를만한 정도의 아티스트들의 트랙들을 리믹스 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느꼈을때 이시기에 그의 리믹스 트랙들은 전체적으로 원곡의 보컬, 샘플링은 그대로 살려둔 채 리듬만 하우스의 리듬으로 변형하는 식의 작업을 즐겼던 듯 합니다. 원곡과 비교해서 들어 보았을때, 멜로디나 보컬은 그대로 유지되어 있는 듯 하지만 드럼 샘플을 좀 더 클럽과 어울리게 무게감 있는 샘플로 변형시켜 리듬감을 강화 시켰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렉트로니카 아티스트 뿐만 아니라, U2, Pet Shop Boys 같은 아티스트 들의 곡을 리믹스 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록이나 팝에서도 하우스의 역량을 실험해보고 싶었던 그의 에고(Ego)를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볼 수 있습니다. 




<François K Boiler Room London DJ Set, 2015>



1983년부터 1989년까지 약 6년간 스튜디오에서의 삶을 지속해온 프랑소와 케이. DJ로 음악을 시작한 그였고 누구보다도 잘 해내었기에 슬슬 플로어에서의 삶이 그리워질 법도 하죠. 아마 작업을 하다가도 작업실 한구석에 먼지 쌓인 턴테이블을 깨끗히 닦아내어 홀로 상상속의 클럽 안에서 디제잉을 종종 즐기지 않았나 한번 추측을 해봅니다. 마침내 1990년 그는 플로어에 다시 서기로 결심합니다. 오랜기간동안의 프로듀서만으로의 생활에 지쳤다기보다, DJ로써의 활동이 그리워서가 아니었을까요? 


그가 컴백할 당시 씬은 더이상 지역간의 문화가 아니었습니다. 로컬보다는 더욱 활발히 국제적으로 씬은 돌아가고 있었으며 아마 그런 흐름을 따라가기에 그가 처음에 조금은 애를 먹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는 80년대 초반 프렐류드 레코즈 시절부터 그의 파트너였던 Larry Levan (래리 르반)과 함께 투어를 기획하게 되었고, 1992년 여름 Harmony Tour (하모니 투어) 라는 타이틀로 일본을 시작으로 하여 월드 투어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후 그는 런던의 'Ministry Of Sound' (미니스트리 오브 사운드), 'Fabric' (패브릭)을 거쳐 이비자의 'Space' (스페이스) 와 'Pacha' (파차), 그리고 이탈리아의 'Angels Of Love' (엔젤스 오브 러브) 등의 클럽에서 공연을 가졌습니다. 프랑소와 케이가 현재까지도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듯이 이때 당시 그가 거쳐간 클럽들도 현재까지 운영중인 그 도시의 씬을 지금까지도 대변하고 있는 역사의 산 증인이라고도 볼 수 있는, 그런 개념의 클럽들입니다. 




<Clip Of Body & Soul 10th Anniversary Celebration, 2006>




1995년 프랑소와 케이는 자신만의 독립 레이블 [Wave Music]을 설립하게 되고, 이 레이블을 통해 자신의 첫 앨범인 [FK-EP]를 포함하여, Floppy Sounds (플로피 사운즈), Abstract Truth (앱스트랙트 트루스), 등의 아티스트들의 앨범을 발표 하기도 하였습니다. 1996년에는 John Davis (존 데이비스)와 함께 'Body & Soul' (바디 앤 소울) 이라는 타이틀 파티를 기획하기도 했는데 이 파티는 흔히 주말밤에 이루어지는 파티가 아닌, 일요일 낮에 야외에서 이루어지는 파티로 기획 되었습니다. 주말 낮에 이루어지는 파티를 흔히 Open-Air (오픈 에어) 라고도 불리는데요, 이 파티가 사실상 장기간 프로젝트로 이어지고, 뉴욕에서도 전설적인 파티로 남아있다는 점은 오픈 에어 파티의 시초라고 보기에도 꽤나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뉴욕의 길거리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파티는 남녀노소, 인종 구분없이 모든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져 즐기며 행복을 느낄수 있는, 다시 말해 좀 더 교양있게 표현 하자면 진정하게 음악으로 사람들의 더 나은 삶을 고양시킬 수 있었던 파티라고 말하고 싶네요.


제 개인적인 경험으로도 비추어 봤을때, 클럽이 아닌 야외에서 파티를 했을때가 좀 더 뭐랄까요. 좀 더 자유분방 하기도 하고 실제로 우리 삶에 더욱 근접해 있는 문화라고 느껴진다고나 해야할까요? 그렇게 느껴지는 이유로는 제가 생각 했을때, 우리가 숨쉴수 있는 상쾌한 공기, 우리가 볼 수 있는 하늘과 내리쬐는 태양빛 등 자연적인 요소들과 함께 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클럽이라는 공간이 음악에 집중하기에는 좋지만 때때로 무미 건조하기도 하고 답답하게도 느껴지는데 야외에서 이루어지는 파티는 이런 한계점을 극복하기에 좋은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클럽과 페스티벌에 즐기러 오는 사람들의 분위기가 사뭇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요?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답답했던 부분이 해소되는 걸 느끼고 그게 겉으로도 드러나기 때문이죠. 저는 페스티벌에 놀러오는 사람들을 보며 그런점을 많이 느꼈습니다. 


제가 공유해드린 바디 앤 소울의 10주년 기념 파티의 클립 영상을 보시면서 잠시나마 오픈 에어의 매력을 만끽 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아, 서울에서도 날씨가 좋은 요즘 오픈 에어 파티를 간간히 찾아볼 수 있으니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한번 가보셔서 즐겨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맥주 한잔을 마시며 음악과 친구들과 함께 칠링하는 분위기를 느껴보시면 그 매력에 푹 빠지게 되실거라고 장담합니다. 




<Francois K>

 


디제이로 시작하여 프로듀서까지, 그리고 다시 디제이에서 전설적인 파티의 기획자. 뉴욕 댄스뮤직의 산 증인, 뉴욕 하우스씬의 아버지 등 현재까지도 왕성한 활동을 펼치는 그에게 뒤따라오는 수식어들은 말로하면 피곤할 정도 입니다. 그의 아카이브를 지금까지 쭉 살펴봐온 결과, 그는 80년대부터 지금까지 뚝심있게 하우스 외길 인생을 걸어온 장인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제가 그냥 막연히 프랑소와 케이가 오랜 기간 동안 하우스씬에 몸담아 왔기에 장인 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닙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이, 그는 하우스만을 바라보고 살아온 사람이기에, 거기서 전 진정성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한 우물만 파는 사람을 장인 이라고 부르는데에는 익숙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미련하다고 느낄수도 있습니다. 만약 대중 시장에서라면, 지금은 하우스 보다는 힙합이나 퓨처베이스, 퓨처하우스 등의 장르를 건드리는게 상대적으로 더 안전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어차피 대중 시장이 아닌 비주류 다시 말해 언더그라운드에 머무는게 스스로가 더 행복하다고 느낀다면 전 그것만으로 아무 문제가 없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행복을 위해 때로는 미련한 태도가 더욱 도움이 될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았을때엔 아무리 바보 같아 보일지라도 말입니다. 




<Larry Levan, Francois k, David DePino>



오늘은 여기까지 프랑소와 케이의 발자취를 탐구해봄과 동시에 그의 음악도 감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여러분께 유익하고 즐거운 시간이 되셨으면 좋겠네요. 지난 5월을 돌아보니 저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슬로우스테디클럽 에서는 리바운드 서비스 마켓을 성황리에 진행하고 마무리 했던 점이 가장 먼저 떠오르네요. 저희는 내년 5월에도 리바운드 서비스 마켓을 개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니, 이번 행사에 방문 못하셨던 분들께선 더 발전된 모습으로 내년에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기대해주세요!


개인적으로 5월에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류이치 사카모토 선생님을 실제로 만났던 기억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남산 소월길에 위치한 '피크닉' 이라는 공간에서 전시를 위해 한국에 며칠간 방문해 주신 그가 제가 살고 있는 동네에 위치한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하실 예정 이라는 소문을 듣고, 전 그가 예약을 한 날 저녁에 찾아갔는데, 류이치 사카모토 선생님이 일행분들과 식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저도 그날 그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였었는데 떨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식사를 하는 내내 그분을 계속해서 쳐다보기도 하였습니다.


류이치 사카모토 선생님이 식사를 마무리 하신 후에는 8년만에 릴리즈 된 정규 앨범 [Async]에 싸인을 받고 함께 사진도 촬영 하였습니다. 제가 27TH TRACKLIST 포스팅에서 소개해드려서 여러분도 알고 계시겠지만 그분은 뉴에이지 음악가 라는 수식어로 설명하기엔 너무나도 폭 넓은 분야에서 작업물을 선보여왔고, 엄청난 방면에 문화적으로 영향을 끼친 분이기에 그를 만난것은 저에게 매우 행복한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누구나 존경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인정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은 어느정도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 면에서 전 류이치 사카모토 선생님을 만난후에 상대적으로 초라하게 느껴진 제 자신을 다시 한번 들여다 보았습니다. 아직은 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게 너무나도 당연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제가 가야할 길로 더 열심히 걸어가야겠다는 생각 역시 들었습니다. 바쁘게 지나간 5월이었습니다. 제가 제 자신에게 도전할 수 있도록 바쁜 환경이 주어진 5월이 너무나도 감사하게 느껴지네요. 그만큼 보람 역시 동일한 크기로 느껴집니다. 6월도 바쁘게 지나갔으면 좋겠네요. 여러분도 6월은 좀 더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아름다운 달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포스팅에서 뵙겠습니다!